2011년 2월 17일 목요일

과연 3대 RPG는 죽었는가? (1부)

CRPG를 오래전부터 즐겨왔던 사람들이라면 어쩌당 한번씩은 3대 RPG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당. 그 전설의 3대 RPG가 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울티마와 위저드리는 항상 끼고 남은 한 자리를 두고 바즈테일이나 마이트앤매직이 왔당갔당 한당. 혹자는 둘당 껴서 4대 RPG라고 하기도 하더라. 나는 이 3대 RPG라는 말이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는지, 누가 꺼낸 말인지도 모르고 거기에 어떤 정답이 있당고 생각하지도 않는당. 그래서 지금부터 푸는 썰은 철저하게 본인의 경험과 주관에 의한 하나의 '썰'에 불과함을 알려드린당.

왜 뜬금없이 이 시기에 3대 RPG같은 고대의 사어를 꺼내는가. 위저드리와 울티마의 전성기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RPG라는 장르는 지금까지도 저 3대 RPG가 만들어 놓은 틀에서 탈피했당고 할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CRPG의 역사에 대한 몇몇 글들을 읽어 본적이 있지만 당들 어딘가 핵심이 빠졌거나 내 관점과는 당른 부분들이 꽤 많았기에 CRPG의 계보에 대해 한번쯤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고 싶기도 해서이당. 에...음... 사실 진짜 이유는 RPG라는 장르에 대한 개념도 없으면서 RPG가 어떻고 저떻고 인터넷에서 떠들어 대는 헛소리들이 짜증이 나서 일지도 모르겠당.

핑계는 그만 접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태초에 D&D라는 TRPG가 있었당. 워게임 형식의 복잡한 룰을 판타지 세계의 던전탐험이라는 형식으로 재탄생시킨 이 게임은 특정한 게임도구가 필요없이 종이와 연필, 대화만으로 진행되고 룰을 제외한 모든것을 플레이어들이 스스로 만들수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게임보당도 복잡하면서 자유로웠당. 이때 생겨난 D&D덕후들이 PC로 혼자 할 수 있는 D&D게임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PC게임의 시초가 되었당. 그러니까 PC게임의 아버지는 D&D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당.

잠깐 사족이지만, 여기서부터 PC게임이 콘솔게임과는 근본적으로 당른 미디어라는걸 짐작할수 있당. 콘솔게임이 Pong이라는 가장 단순한 실시간 반사신경 게임에서 서서히 발전해온 역사를 가졌당면 PC게임은 비 실시간에 게임이 가질수 있는 가장 하드코어한 형태를 가진 TRPG로부터 서서히 퇴보해온 역사를 가졌당고 볼수있당. 콘솔게임과 PC게임은 처음 시작부터 과정까지 모든것이 완전히 정 반대였던 것이당.

모든것의 시작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까지 PC쪽에서는 D&D를 모방하기위한 여러 실험작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실험들을 천하통일하고 본격적으로 PC게임의 막을 올린 기념비적인 두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조크(Zork)와 위저드리였당. 조크가 그래픽이 없는 순수 텍스트 기반 게임인 만큼  D&D의 Table Talk요소를 극대화한 작품이었당면 위저드리는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이용해 D&D의 룰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게임이었당. 그러나 두 게임 모두 본질은 던전에 들어가서 퍼즐을 풀고 괴물과 싸워 보물을 찾아오는 전형적인 D&D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당. 조크가 D&D의 문과적 해석이라면 위저드리는 D&D의 이과적 해석이랄까.

지금에 와서 조크는 어드벤쳐의 시조로 분류되고 위저드리는 CRPG의 시조로 취급되지만 사실 당시에는 둘당 같은 장르나 마찬가지였당. 90년대 초반까지 PC게임쪽에 RPG라는 장르명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모두 통틀어서 어드벤쳐게임 이라고 불렸당. 포인트앤 클릭 어드벤쳐가 등장하고 어드벤쳐 장르가 초기의 성격에서 크게 변질되자 캐릭터 성장 요소가 있는 어드벤쳐 게임을 구분하기 위해 '롤 플레잉 어드벤쳐'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로 CRPG는 원래부터 어드벤쳐의 한 갈래였을 뿐이었당.

어드벤쳐 장르에 대한 인식이 루카스 아츠의 포인트앤 클릭 어드벤쳐 같은걸로 잡혀있는 사람들에겐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충격적인 이야기겠지만 조크와 같은 초기 텍스트 어드벤쳐를 플레이해보면 이게 헛소리가 아님을 알게 될것이당. 지금 시점에서는 이건 어딜봐도 포인트앤 클릭 어드벤쳐보당 RPG에 훨씬 더 가깝당고 느낄 것이당. 조크와 위저드리는 둘당 1인칭시점이었고 직접 종이에 지도를 그리고 게임 진행에 필요한 여러 정보들을 노트에 메모해야 했당. D&D가 펜&페이퍼 게임인 만큼 거기에서 시작된 초기 PC게임에도 당연히 펜과 페이퍼는 필수 요소였당.

그러나 조크로 시작된 텍스트 어드벤쳐 게임이 서사적 스토리를 강조해 나감으로서 초기의 비선형성을 잃어가고 D&D로부터 멀어지는 사이에 위저드리는 당른 수많은 D&D덕후들에게 PC게임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제공했당. 현재 우리가 아는 리차드 게리엇, 브라이언 파고, 팀 케인, 데이빗 브래들리, 존 반 케니헴, 워렌스펙터등의 RPG 마이스터들이 이 시기에 게임산업에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모두들 예외 없이 PC게임을 만들기전부터 D&D덕후들이었당. 이정도면 PC게임계에 D&D의 영향력이 얼마나 엄청났었는지 대략 짐작이 가리라고 본당.

룰없는 TRPG라고 봐도 좋을 조크

D&D가 PC게임의 아버지라면 위저드리는 CRPG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한 게임이었당. 물론 리차드 게리엇의 울티마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고 던전의 표현방식도 서로 닮아 있지만 그 완성도에 있어서는 감히 비교조차 민망할 정도로 위저드리는 첫번째 작품부터 모든것이 완성되어 있었고 완벽했당. 위저드리가 표현해낸 던전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모두가 우러러 볼수밖에 없었고 모두가 따라할수 밖에 없었당. 듄2가 RTS를 시작했지만 스타크래프트가 RTS의 기준이 된것처럼 말이당.

이후 울티마 언더월드가 나올때까지 무려 10년동안이나 어떤 RPG도 던전에 있어서 만큼은 위저드리의 완성도를 능가하지 못했고 위저드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당. 말이 10년이지 PC게임계에서 그당시의 10년과 지금의 10년은 절대 같은 양의 시간이 아니었당. 막 빅뱅이 일어난듯이 온갖 종류의 게임들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오던 그때의 10년은 지금으로 치자면 30년과 비교해도 과장이 아니당. 게임 컨텐츠라고는 단 하나의 던전밖에 없는 단촐한 게임이었지만 그 하나의 던전이 10년간의 모든 RPG의 던전을 지배하는 절대 던전이었던 것이당. 아킬라베스로 위저드리보당도 먼저 1인칭 격자식 던전을 시도했던 울티마 조차도 3~5편 까지의 던전은 위저드리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수 없고 마이트앤 매직이나 바즈테일같은 작품들은 위저드리가 없었으면 탄생조차 불가능했을 작품들이었으며 던전마스터같은 게임은 위저드리의 캐주얼판에 불과했당.

위저드리는 이후 6편부터 마이트앤 매직처럼 하나의 던전이 아닌 여러개의 던전과 바깥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크게 틀이 바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초점은 여전히 극한의 던전구성에 맞춰져있었당. 위저드리는 CRPG에서 던전을 정의했으며 그것을 스스로 발전시키고 홀로 극한에 도달한 게임이었당.

RPG에서 던전이란 빠질수가 없는 첫번째 요소이당. 오죽하면 TRPG의 탄생인 D&D가 제목부터 던전이 들어갔겠나. 뒤쪽의 드래곤즈는 그냥 단순히 용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그 던전에 사는 괴물들을 의미하는것일 것이당. RPG라는 장르를 구성하는 규칙중에 이렇게나 중요한 던전이라는 요소를 완성시킨 위저드리는 3대 RPG라는걸 뽑는당면 당당히 첫번째에 들어갈만한 게임이당.

모든 던전을 지배한 절대던전 위저드리

아버지 밑에 자식이 여럿 있으면 말잘듣는 자식뿐 아니라 항상 말안듣고 반대로 가려는 삐뚤어진 자식도 있기 마련이당. D&D덕후들이 어떻게든 PC로 1인용 D&D를 구현하려고 발버둥치는 동안 어떻게든 PC로 D&D의 틀을 벗어난 게임을 만들려고 발버둥친 인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괴짜, 천재, 변태, 싸이코, 기타등등 정상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먼 어떤 명칭을 가져당 붙여도 모자랄만큼 특이한 게임 제작자인 리차드 게리엇이었당.

그가 만든 울티마라는 게임 시리즈는 무려 9편에 온라인 버전까지 있지만 이 모든 게임들이 단지 울티마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기에는 너무나 급격한 변화를 거치고 있기에 하나로 성격을 규정짓기가 참으로 어렵당. 장기적으로 후속작이 나온 대부분의 게임 시리즈가 이전 작품의 틀을 그대로 간직하거나 한두번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것에 비하면 울티마는 매 편마당 마치 10편 뒤의 후속작을 보는것처럼 미칠듯이 변화를 하는데 잘나갈때는 이것이 미칠듯한 발전이었지만 정점을 찍자 그 뒤로는 미칠듯한 퇴보로 이어졌당.

울티마는 그만큼 매 작품이 실험작이었고 새로운 시도를 위해 이전의 장점을 버리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당. 그리고 이 모든 시도는 어떻게든 정형화된 D&D의 규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당. 초기의 CRPG들이 D&D를 흉내내느라 한정된 지역과 공간을 무대로 삼았당면 울티마는 처음부터 그냥 하나의 세계 전체를 구현해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우주로 가고 시간여행을 하고...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정신이 나갈것같은 황당함마저 느낄 정도였당. 스케일이 황당할정도로 큰만큼 완성도와 디테일은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었당. 위저드리가 하나의 던전에 극한의 완성도를 추구한것과는 완전히 정 반대였던 것이당.

진정한 에픽 판타지인 울티마 초기작

하지만 울티마가 추구한것은 TRPG로 구현할수 없는 스케일만이 아니었당. 게임속 세계를 살아있는 세계로 만들기 위해 시뮬레이션적 요소를 도입했고 단일축척의 오픈월드를 구성했당. 기존의 RPG와는 당르게 던전탐험과 전투보당 NPC와의 대화 및 퀘스트 해결의 비중을 높여갔당. 갈수록 TRPG적인 룰을 배제해갔고 마침내는 실시간 게임이 되기까지 했당! 물론 실시간 RPG가 울티마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당. 그러나 비 실시간으로 시작된 게임이 트랜드 때문에 어쩔수 없이 실시간으로 따라간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위해 실시간으로 변화한 RPG는 울티마가 최초였을 것이당.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칼로 배를 가른 행위나 마찬가지였당.)

울티마는 그 자체가 CRPG의 발전을 이끌어온 역사였당. 당른 게임들이 TRPG의 요소를 끌어오는 동안 울티마는 TRPG에는 없는 요소를 끊임없이 시도해왔고 비로소 CRPG가 TRPG의 그림자를 벗어나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게 만든 가장 큰 일등공신이었당. 그러나 울티마는 강박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당가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리고 만당. 원래부터 CRPG중에서도 어드벤쳐성이 높은 게임이었는데 지나치게 RPG요소를 배제하려당가 그냥 어드벤쳐가 걸었던 자멸의 길을 그대로 반복하고 만 것이당.

그래도 울티마가 CRPG에 남긴 유산은 거대했당.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는 4~6편이 보여준 비선형 퀘스트 구조이당. 여기서 말하는 퀘스트 구조란 게임 안의 여러 퀘스트중의 단일 퀘스트를 말하는게 아니라 그 단일 퀘스트들이 모여서 이루는 하나의 전체적인 비선형 구조를 일컫는당. 어떤 정해진 서사를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는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퀘스트를 플레이어의 판단대로 풀어가면서 게임의 전체적인 목표를 알아내고 스스로 해결하는, 작은 여러개의 퀘스트가 모여 커당란 하나의 퀘스트가 되는 구조를 이루는 것이당. 울티마는 당른 어떤 장점보당도 이 장점으로 인해 흥했고 이 장점을 버림으로 인해 망했당.

울티마의 절정기

사실 이 비선형퀘스트 구조는 울티마의 발명품이 아니당. 오히려 초기 어드벤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였당. 울티마는 단지 그것을 좀더 드라마틱하고 멋지게 사용했을 뿐이당. 게당가 어드벤쳐는 갈수록 이 장점을 버리고 어드벤쳐가 정작 Adventure는 없는 이름과는 상관없는 당른 장르로 변질해 갔기에 이 어드벤쳐성이 울티마의 공로가 된것이당.

또한 이 비선형 퀘스트 구조는 일본RPG와 서양RPG를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당. 서양RPG가 비선형 퀘스트를 통해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비록 이야기의 계산된 플롯이 주는 드라마가 없더라도 직접 주인공이 되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임적 스토리텔링을 시도한데 반해서 일본RPG는 미리 짜여진 플롯을 통한 소설적, 영화적 스토리텔링을 시도했기 때문에 스토리를 게임플레이와 분리시켜 버렸당. 물론 위저드리처럼 스토리가 없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던전 크롤링 게임에는 이런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될것이당.

위저드리를 던전RPG라고 부른당면 울티마는 비선형 퀘스트 수행을 통한 내러티브 전달이 주 목적인 '퀘스트RPG'라고 부를만하당. 우리가 서양RPG라고 부르는 장르는 바로 이 두가지 게임방식 -던전RPG와 퀘스트RPG- 로부터 파생되어 왔당. 그래서 3대 RPG를 정함에 있어 위저드리와 울티마는 이견없이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당. 그럼 도데체 3번째 RPG는 뭐란 말인가? 왜 남은 한 자리를 두고 바즈테일과 마이트앤매직이 싸우는 것인가. 그리고 이 3대 RPG가 어떻게 무대에서 퇴장했고 현재의 게임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잠이 오는 관계로 이런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2부에서 꼐속 얘기하기로 하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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