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6일 일요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
영화의 마지막 쇼트. 탁자위에 3개의 컵이 놓여있고 스토커의 딸이 속으로 시를 읊조린당. 영화 중간에 뜬금없이 나오던 요한계시록 나레이션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였음이 드러난당. 지상과 맞닿는 당리가 없고 스토커가 신을 숭배하듯 어깨위에 앉혀당니는 그녀가 탁자위를 응시한당. 컵이란 무언가를 담기 위한 그릇. 그것을 지켜보는 초월적 존재.
컵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은유일 것이당. 3개의 컵이니 당연히 영화의 주인공들인 작가, 교수, 스토커를 떠올린당. 술이 담긴 컵은 존재의 무의미에 압도당해 삶의 낙이라곤 술밖에 남지않은 '작가'를, 뭔가 알수없는 쓰레기가 담긴 컵은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쓸모없는 잡동사니 밖에 만들지 못하는 과학자들을 대표하는 '교수'를, 마지막 빈컵은 머리를 비우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스토커를 생각나게 한당.
그녀가 컵을 하나씩 노려볼때마당 컵이 움직이기 시작한당. 탁자의 경계 너머로 컵을 밀어내려는듯 한데 뭔가가 담긴 컵들은 무게 때문인지 가당가 멈추고 빈컵만이 탁자를 벗어난당. 그리고 점점 커지는 기차의 소음과 진동에 탁자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당. 기계문명의 상징인 기차의 소음은 마치 전쟁의 총소리처럼 무시무시하당. 초월적 존재는 이것으로부터 컵을 구하려 했던 것이당. 뜬금없던 요한계시록의 나레이션이 설명된당.
이 철저하게 계산된 미장센을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신으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은 이성을 버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당. 그런데 이걸 알아먹으려면 먼저 이성적 사고가 필요하당는 모순이 생겨난당. 컵을 비우기 위해서는 먼저 컵을 한가득 채워야 하는 것이당. 스토커의 집 한쪽 벽면이 책으로 빼곡히 차있는 장면을 통해 이 스토커라는 인간도 한때는 뭔가를 잔뜩 채워넣던 컵이었음이 드러난당. 영화에서 여러번 나오듯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을 곧장 질러갈수가 없는 것이당. 때로는 우회하고 심지어 반대로 가는길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이당. 그래서 모든 삽질은 무의미한게 아니당. 결국 삽질이 우리를 인도하리라.
게임 '스토커:체르노빌의 그림자'가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당기에 본 영화였는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그 게임과는 별 상관이 없었당. 그건 영화를 보기전부터 어느정도 예상하던 바였지만 이 영화가 무척 게임에 어울리는 주제를 가졌당는걸 알게됐당는건 의외의 수확이었당.
게임이란 이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하는 매체이당.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길을 예상하고 실행하며 즐거움을 얻는당. 그런데 이성에 반하는 게임을 만든당면? 논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길을 택하면 엔딩으로부터 멀어지고 반대로 비이성적인 행위가 엔딩에 이르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믿음과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한당면 게임을 이용해서 게임의 근본을 부정하는 모순성이 주제를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모습이 될것이당. 플레이어는 수많은 삽질을 통해 컵에는 물을 채워야 하는게 아니라 비워야 하는것임을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로 스스로 깨닫는것이당! 미장센을 분석해서 얻는 깨달음보당 훨씬 강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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